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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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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 누리길안내-경로안내,코스안내,난이도,코스특징
경로안내 만촌동 모명재 - 형봉 - 제봉 - 고모령 - 영남제일관
코스안내 7.2km/2시간/편도코스 난이도
코스특징
  • 잠시 쉬어가는 곳 : 무인카페, 형봉 체육시설지, 제봉 체육시설지
  • 화장실 : 만촌역, 망우공원관리사무소
  • 주차장 : 망우공원 주차장
  • 걷기좋은 계절 : 봄, 여름, 가을, 겨울

코스이야기

두릉두씨 모명재

  • 모명재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에 세워져있는 모명재는 임진왜란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으로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대문에 달려있는 만동문이란 명판역시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이도한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모명재는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앞에 지은것인데 1966년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있으며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모명재가 앞쪽에 있습니다. 정면4칸 측면2칸규모의 겹처마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규모의 퇴칸을 두고있습니다.조선에 귀화한후 계산동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명나라[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이나 최정산[지금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명동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 명정각

    두사충의 재실이 있는 서쪽 100m 지점에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효자각이 명정각이다. 이 효자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旌閭)을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호는 소남(小楠)으로 1823년(순조23년)에 태어난 1893년(고종3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중에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그의 사후에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종3품 관직인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을 증직하였다. 현재의 명정각은 1912년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를 지을 때 함께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66년 후손들이 모명재와 함께 보수 하였다.

  • 두사충의 묘소

    두사충은 중국 두릉사람으로 임난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우리나라를 도우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난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성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고모령 전설 따라

  • 감옥 간 독립군 아들

    고모령과 관련된 일본제국시대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왜정 시대에 경산에 있는 작은 마을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았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두 아들은 왜놈에게 잡혀서 모두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남편없이 기른 두 아들이 모두 감옥에 가 있는 것이 어머니로서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는지라 시간만 나면 감옥으로 면회를 가곤 했다. 그날도 대구 감옥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모령 고갯길에 이르렀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고모령을 넘어오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경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고개를 넘어야 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대구가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고개는 고개를 돌려서 본다는 고(顧)와 어머니 모(母)를 붙여서 고모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효자와 동자삼

    옛날 옛적 이곳에 금슬 좋은 부부가 나이 드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마침 홀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부부는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어머니는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그 부부의 집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아이를 삶아서 어머님에게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부부는 자기의 아이를 삶아서 부모님을 구하기로 작정하고, 놀러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물을 가득 넣고 끓여 놓은 가마솥에 집어넣다. 아이를 가마솥에 넣은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불을 지피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분명 가마솥에 넣어서 끓이고 있는데 아이가 바깥에서 놀다가 들어온다며 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부부는 솥을 열어보았다. ‘어?’ 솥 안에는 아이 대신 커다란 산삼이 누워 있었다. 솥 안에 넣었던 아이는 부부의 효심에 탄복한 하늘이 보낸 천년 묵은 산삼이었다. 아이 모습을 한 동삼(童參)이 가마솥에 넣어지기 전에 어머니를 흘끗 돌아본데서 이 고모(顧母)라는 지명이 생겼다.

  • 형제봉과 고모령

    옛날 고모령에는 남편 없이 어린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와서 이 집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다고 하여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게 되었는데 현재의 모봉, 형봉, 재봉 이라는 3개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동생과 형이 서로 높이 쌓고자 시샘을 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으로 집을 나와 버렸다.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그래서 정상에 와서 집을 향해 뒤돌아 봤는데 그 이름이 뒤돌아 볼 고(顧), 어미모(母)를 합쳐 고모라는 마을 이름도 이 곳에서 나왔다.

비 내리는 고모령

  • 고모령 노래비

    <비 내리는 고모령>은 현인이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현인과 함께 히트작을 많이 낸 유호와 박시춘 콤비의 작품이다. 유호의 필명인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의 〈비나리는 고모령〉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에 발표되었다. 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顧母嶺)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 곳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을 비롯해 유래에 대해 여러 일화가 전한다. 발표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경상북도 경산군이었으며, 인근에는 경부선 철도역인 고모역이 있다.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래 속의 고모령은 한 맺힌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며 "눈물 어린 인생고개"로 은유되기도 한다. 이 곡은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다는 해석이 있다. 스스로를 "망향초 신세"라 자조하면서 비통하게 향수를 달래는 내용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격동기의 시대 상황과 잘 어우러졌고, 이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1969년에는 임권택 연출로 이 노래의 제목을 딴 동명의 멜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에 방송 20돌을 맞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전체 순위 3위를 차지하여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다. 2001년에는 노래의 무대인 고모령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앞면에는 노래의 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김문호 기자 불망비

    고모령 노래비 옆에는 김문호 기자 불망비란 조그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1년 9월 27일 고모령에 가을비가 내리던 날 한국일보 김문호(당시 29세) 기자가 고모령을 취재하다 열차에 부딪혀 숨졌다. 고모역 바로 맞은편 ‘고모상점’을 운영하는 최정열씨는 “사고 당일 끓여준 라면이 이청년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며 가끔 꽃 한송이에 소주 한잔 올린다“며 안타까워한다. 김문호 기자 불망비의 내용은 이러하다.사진기자 김문호(1963.3.10~1991.9.27)는 경상북도 안동태생이다. 고향에서 안동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세종대학교를 졸업했다. 언론의 길에 뜻을 세우고 공채시험을 통해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다. 늘 밝고 부지런 했으며 남다른 끈질김과 정의감으로 시대의 현장을 뛰고 달렸다, 가을비 내리던 이곳 경부선 철길은 그가 달려간 마지막 현장이다. 고모령 노래비 취재에 열중하다 뒤에서 달려온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순직하니 아깝고 또 아깝다. 29세 젊음을 뜨겹게 마감한 김문호 기자여! 그대의 영원한 기자혼을 이 돌위에 새긴다. 1992. 7. 27. 김문호 기자 1주기에 한국일보 사우일동 한국사진기자회

비 내리는 고모령

  • 금호강 생태습지

    금호강이 팔현마을을 끼고 돌면서 강의 유속이 약해져 가천동까지 작은 섬과 퇴적지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조류와 수달이 많이 서식하며 인근 학교에서 팔현마을 금호강 습지를 생태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팔현마을 조류보호지역

    인터불고 호텔 고모령을 지나면 도로변에서 금호강 강변에 형성된 30여호의 자연부락으로 포도밭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금호강 생태탐사지역, 조수보호지역(백로서식지)이 위치해 있다. 1997년 수성구청에서 경북대학교 교수진, 조류전문가, 관계공무원으로 구성된 조사반을 구성, 정밀생태조사를 마쳤고 팔현마을에 조류관찰 전망대와 철새보호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팔현동 주변에 동촌유원지와 인터불고호텔 등의 휴양지가 있으면 아양아트센터, 조양회관, 망우공원 등의 역사문화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이외에 만촌자전거경기장, 팔현빗물펌프장 등의 시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금호강과 제방 전경이 아름답다.

모명제길 마을 이야기

  • 골짜기가 많았던 만촌동

    조선시대 구릉지대로 마을 주변이 독무산(獨茂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바리고개골, 지장골, 두봉골, 각계골, 남작골 등 골짜기가 많다.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하씨, 달성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쓰며 학문을 숭상한 나머지 생업은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에서 ‘늦이’라고 불렀던 것이 만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남부주차장 뒤편의 계곡을 지장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사가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됐다. 또 지장골, 형제봉골 일대를 통들어 뱀골이라 불렀으니 옛날 이 일대에 뱀이 많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현재 군부대 안에 있는 못이름이 사동지인 것도 그 때문이다.

  • 갈대의 동네 가천동

    원래는 현풍군 묘동면 지역으로 ‘갈내’라고 불렸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가천동이 되어 달성군 유가면에 편입되었다. 1981년 대구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구직할시 수성구 가천동이 되었고, 1987년 일부를 동구 율하동에 넘겨준 뒤 1995년 대구광역시 수성구 가천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고산2동이다. 지명은 갈대가 많은 냇가라는 뜻이다. 똥미산·등비산(84m) 등의 야산과 들녘인 새들[新坪]·진등들 등이 있다

  • 근대문화재 고모관사

    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도관사로 단층연립 2호주택(2세대1동)의 형태를 지닌 8등관사로 철도사적, 건축적 가치가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고모동관광센터와 고모동마을가꾸기센터로 리모델링이 가능한 공간이다.

  • 1969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비나리는 고모령’

    김희갑, 문희, 박노식이 출연하고 김희라가 데뷔한 영화 1969년의 ‘비나리는 고모령’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 악극 ‘비내리는 고모령’

    한국적 뮤지컬의 원조 극단 가교의 일곱 번째 공연이며 코믹연기의 대가 박인환과 최주봉이 열연하고 양재성, 박승태, 주수정, 정찬우 등 국내 최고의 연기자 드림팀의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고도 진한 여운이 남는 악극 “비내리는 고모령”은 지난 시절 추억의 앨범을 뒤적이듯 작은 감동이 전해지는 가슴 뭉클한 무대이다

  • 달집태우기 - 팔현정월대보름제

    고산지역에서 자생한 ‘고산농악보존회’에서 매년 정월대보름 진행하는 행사로 팔현마을 금호강 둔치에서 열린다.

  • 영남제일관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구릉과 산성을 방수의 요충으로 중시하고 평지에 있는 취락에 성지를 축조하는 예가 드물었다. 지금 시내에 있는 달성은 삼국시대 이래 여러 차례 가축된 바 있지만 이것은 읍성이 아니고 오히려 관아를 중심으로 방수한 것이었다. 대구의 평지에 성축 한 것은 부사로 취임한 윤 현(尹峴)때 일이다. 그는 선조 24년에 선산 군위 안동의 3개 읍민을 징집하여 대구부민과 더불어 축성을 완료했다고 대구부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토성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으로 파손되고 그후 140년이 지난 영조 12년에 석성이 새로 축조되었다. 1601년(선조34년)이후부터 한말까지 대구에 경상동 관아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인식된 때문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때까지 백수십년이 지나도록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부성의 재축조가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사회의 무력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석축의 대구읍성은 경제력이 회복된 영조 12년에 축조 되었는데 영조 11년에 대구로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 민 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 들이고 영조의 윤허를 얻게 된데서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축성비에 의하면 영조 12년 4월 8일에 채석을 시작하고 4월 25일에 본성채를 이룩하고 6월 6일까지 여첩(女堞)을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의 4정문이 있고, 문에는 본루를 세웠는데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 칭했고, 특히 남문에는 영남 제일관의 편액(扁額)을 달았다. 이밖에 동서에 두 개의 암문이 있었다. 영조 12년에 석축된 읍성은 몇 차례의 수축이 있어서 온전하게 보존해 왔으나 광무 10년과 11년 사이에 남문과 더불어 완전히 헐리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남문 사진을 보면 성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석축기대(石築基臺)를 세웠으며 규모는 하층의 정면 측면이 모두 세칸이다. 남문을 처음 축조한 사람이 관찰사 민 응수이며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취임하기 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전주 풍남문(豊南門)을 세웠다. 대구시는 1980년 남문인 영남 제일관을 수성구 만촌동 금호강변에 옛 모습을 살려 중건함으로 조상의 얼을 시민에게 전하고 있다.

모명재누리길 찾아가는 길 및 문의처-찾아가는 길,주변관광지,포토존,문의처
찾아가는 길
  • 버스
    • 모명재 : 100, 349, 425, 427, 420, 449, 724, 849, 937, 수성2번을 타고 남부정류장 하차 모명재로 이동 250m/4분
    • 망우공원 : 106, 521, 651, 북구3, 156, 508, 518, 708, 808, 814, 849를 타고 망우공원 하차 후 도보탐방
  • 도시철도 : 2호선 만촌역 하차(1번출구), 모명재까지 도보 500m/8분
    대구도시철도노선검색 http://www.dtro.or.kr
주변관광지
  • 모명재 두사충 유적지(조성중 2013년 5월 완공예정)
    • 수성 만촌동715-1
    • 명정각 두사충의 묘, 고모역, 이팝나무 보호수, 동대사
  • 고모역, 이팝나무 보호수(고모역 앞)수성패밀리파크
  • 동촌 유원지, 수성패밀리파크, 동대사
맛집/민박 옹심이 칼국수[수성구 고모로 183(고모동) ☎(053)794-1555
동촌유원지 음식점, 만촌동 콩나물해장국, 제주생해물, 리안 퓨전중화요리(수성대학교 앞)
포토존 사진찍기 좋은 곳 : 모명재, 고모령, 영남제일관
문의처 수성구 문화체육과 문화재팀 ☎(053)666-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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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수정일
2017.09.01